금요일 오후, 어김없이 써니를 하원시키려고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써니와 마주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기분 좋게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하루 유치원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묻고 답하고 있던 그 순간, 써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써니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아빠, 유치원에는 약속이 많아.
그런데 나 오늘 약속을 어겼어..
써니의 말을 들어보니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한 3월이기 때문에 유치원 선생님께서는 써니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교실에서 지켜야 할 약속, 밥 먹으면서 지켜야 할 약속, 화장실에 갈 때 지켜야 할 약속 등등 유치원 생활에 필요한 규칙들을 설명해 주시고 그것들을 지켜달라고 교육하시는 기간인 듯했다.
그런데 그 약속 중에서 가장 써니가 지키기 어려워하는 약속 하나가 있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유치원에서 뛰지 않아요'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활동성이 많은 아이라서 조심하고자 여러 번 이야기를 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걷기보다는 뛰어가는 것이 익숙한 써니에게는 너무나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인 것이다.
내가 눈을 떠 보니 나도 모르게 '경주'를 하고 있었어...
선생님이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상황을 설명하는 써니의 말을 들어보니, 유치원 교실 안에서 놀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발이 빨라져서 뛰어가게 되었고 그것을 본 선생님께서 뛰어가는 써니를 제지하셨던 것 같았다. 그래서 써니에게 선생님께서 왜 뛰지 말라고 하셨는지 물어보니 써니를 비롯한 친구들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게 뛰어가게 되었는데 선생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써니에게 지금 이렇게 약속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리고 다음부터는 써니와 친구들이 다치지 않도록 뛰지 않겠다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고 토닥여주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일, 그리고 매 순간 누군가와 '약속'을 하며 살아간다. 오늘 점심에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오후에 거래처와 계약 내용을 수정하기 위한 미팅 계획을 잡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이번 달에는 꼭 살을 빼기 위해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하겠다고 나 스스로와 굳게 다짐하기도 한다. <표준국어 대사전>에서 정의한 '약속'을 보게 되면 이와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 또는 그렇게 정한 내용
<표준국어대사전>
그러나 문제는 이 '약속'에 대한 마음가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약속'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 때문에 설레어서 밤잠을 설치기도 하는데,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며 애를 쓰는 반면, 누군가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약속'은 깨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이 유행하기도 한다.
《字源 》에 따르면, '약속'에 해당하는 '約맺을 약'은 ' 糸(가는 실 사)'자와 '勺(구기 작)'가 결합한 형성자(形声词)이다. 이는 본래 “约,缠束也。”라 하여 '휘감아 묶다缠束' 또는 '줄로 묶다捆缚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가 후에는 '단속하다, 약속을 지키다约束' 라는 뜻으로 인신되었다가 '통제 및 지휘 통솔하다节制'라는 뜻까지 갖게 되었다.
<표준국어 대사전>과 한자의 뜻을 종합해서 보면 '약속'이라는 것은 타인과 어떠한 일에 대하여 미리 정하여 두는 것인데, 이 '약속'을 통하여 당사자 간에 줄로 묶인 것과 같이 서로 연결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서로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어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의 '약속'을 쉽게 생각하고 어겨버린다면, 우리의 관계 역시 쉽게 깨어지고 부서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생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시무룩한 써니를 보며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린도전서 11:25
In the same way, after supper he took the cup, saying, "This cup is the newo covenant in my blood; do this, whenever you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1Co 11:25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언약'을 맺으심에 있어서 절대 쉽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우리와 언약을 맺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친히 물과 피를 쏟으셨다. 그리고 우리와 '언약'을 맺어주시며 단 한 가지를 요구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약속'의 대가는 바로 '예수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약속을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을 생각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 역시도 타인과 '약속'을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지금 이 사람과 '약속'을 하게 하심 역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약속'을 쉽게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쁜 일정에 잊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써니처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함에 있어서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약속'은 그 사람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통로이고, 이 통로를 통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될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관계는 예수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 하원한 써니에게 오늘은 선생님과, 친구들과 한 약속을 잘 지켰는지 물어봐 주어야겠다. 물론 오늘도 금방 잊고 교실에서 뛰어다니기도 하고 장난감 정리하는 것을 깜박하기도 하겠지만, 써니의 마음 안에 선생님과 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약속' 안에는 하나님께서 써니의 손을 잡아 이끌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써니야!
선생님과 한 약속을 어긴 것이 마음에 걸렸구나?
그래도 써니가 선생님과 한 약속을 기억하고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것만으로도 아빠는 이미 훌륭하다고 생각해.
물론 다음에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해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써니를 보면서 선생님도 너무 기뻐하실거야.
그리고 써니야,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
'약속'이라는 건, 또 하나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란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해.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이 약속을 위해 계획하시고 일하시고 계시거든.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는 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며
써니도 힘을 내어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좋겠어.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그리고 그 '약속' 뒤에는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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