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재조명/육아 일기

과정의 미학

kshroad 2021. 5. 9.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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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가 태어나기 전,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 써니가 곧 태어나는데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써니가 태어나면 잘할 수 있겠지?
👩 나는 10달을 내 뱃속에 품고 있었지만, 자기는 그런 과정이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냥 지금처럼만 함께 있어주면 돼.

임신테스트기에 빨간 두 줄을 보았을 때에는 진짜 생명이 태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지내다가 보니 곧 출산을 앞두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10달 동안 초음파로, 태동으로 생명을 느꼈는데 막상 곧 출산을 앞두고 나니 진짜 내가 아빠가 되는 것인가 하는 막연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멍해 있는 나에게 잘할 수 있다고 아내는 응원해 주었고, 써니를 안아보면 실감 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이름이 불리움과 동시에 나는 아주 작은 써니와 마주하게 되었다. 써니와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아내가 괜찮은지 걱정되어 기쁨과 설렘보다는 초조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고 조리원의 생활도, 100일이 지나면서까지도 복잡미묘한 마음은 계속되었다. 아내는 써니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며 귀엽다고 재잘거리는데 솔직히 나는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써니가 참 예쁘기는 예쁘지만, 그 옆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내가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말을 했다.

👩 나는 자기가 써니가 태어나고 나면 나보다 더 써니를 예뻐할까 봐 걱정했었어. 그런데 여전히 나를 먼저 생각해줘서 너무 고마워.

그 말을 듣고 문득 조카가 태어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조카가 너무 예쁘지만 그 옆에 고생하는 누나가 먼저 들어와 조카가 마냥 예쁘지만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생각보다 아기를 안 좋아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진짜 써니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더 표현하고 부대끼면 달라질까 싶어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에는 육아휴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육아는 시작되었다. 물론 생각했던 것만큼 능숙하게 먹이고 씻기고 재우지는 못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나름대로의 요령이 생겨 써니를 재우고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러나 문제는 이유식을 하게 되면서이다. 이유식 한 끼를 준비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먹이는 것은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점심을 준비하고, 점심을 먹이면서 저녁을 준비하고, 저녁을 먹이며 다음 날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생활이 생각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어느 날, 잠든 써니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아, 아내는 써니의 이런 표정을 보았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난 두 달을 돌아보니, 육아휴직을 하며 아내의 말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과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써니가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는 어떤 표정이며,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일 더 좋아하는지, 어떤 자세를 좋아하는지 등등. 크게 공감하지 못했던 아내의 말들이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육아휴직하기를 잘했다!"

사랑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2012)>, 이어령·이재철, 홍성사, 서울, p.246.

나는 써니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친구들에게 진짜 '사랑'을 느껴보고 싶으면 육아휴직을 해서 온전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 보라고 이야기를 한다. 온전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함께 호흡하며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라고 말이다. 그러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써니는 걷기 시작했다. 아장아장 서툰 발걸음으로 나에게 걸어오는 써니를 보면서 '언제 이렇게 컸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옛말에 아기들은 자고 일어나면 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의 써니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남은 육아휴직 시간이 '사랑'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과정임을 기억하며, 써니와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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