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서 학교에 있던 짐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썼던 교무일지를 발견하였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약 8년간의 교직생활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기분이 묘했다.
그간 8년의 고민과 노력이 녹아있는 것을 살펴보니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수업에 대한 고민도 참 많이 했지만, 그보다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생활지도'이다.
공립에서는 줄곧 학생부 업무만 맡았고 지금 기독대안학교에서는 담임이 모든 생활지도를 함께 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올바르게 '훈육'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래서 초임 때에는 옆 선생님을 따라 소리도 질러보고, 가벼운 욕도 섞어 이야기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 방법이 아니었기에 금방 지쳐버리고 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며 학생들과 함께 소통하며 지내려 노력하였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이 '훈육'에서 잠시 떠날 수 있을까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그러나 이제는 10개월이 되면서 목욕할 때 엄마를 깨무는 도하를 보며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이야 왜 그랬는지 들어볼 수 있기라도 하지만, 10개월 아이가 왜 그랬는지 그리고 왜 그러면 안되는지를 설명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렇게 도하를 위해 기도하면서 '훈육'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학창시절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선생님들께 매를 맞았던 기억이 있어서 일까, 일반적으로 '훈육'이라고 하면 잘못된 행동에 대해 혼이 난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고 엄격한 분위기에서만 가르쳐야 하는 것이 '훈육'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훈육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고치게 하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훈육은 또한 육체적, 감정적, 지적으로 건강하게 발달할 수 있는 길을 아이에게 안내하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은 당신 아이의 첫번째 선생님입니다(2020)>, 라히마 볼드윈 댄시, 강도은 옮김, 정인출판사, 서울, p.232.
개인적으로 '훈육'이라는 것은 마냥 혼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는 훈육이란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름'이라고 표현한다. 즉, 그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려주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안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매를 동반한 것은 물론이며, 아이의 발달 상황에 따라서 말로 타이르는 것 역시도 '훈육'의 한 방법인 것이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의 신체를 상하게 하는 행위가 있을 때에는 강하게 저지하고 훈육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는 '훈육'과 '학대'를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엄연히 이 둘은 다른 것이다. '훈육'은 건강하게 발달할 수 있도록 아이를 안내하는 것이지만, '학대'는 이와 반대로 아이의 영육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가 자라감에 따라 가르쳐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에 자연스럽게 '훈육'을 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나의 말과 행동이 아이를 건강하게 발달할 수 있도록 돕고 안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아이의 태도를 똑바로 고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당신 아이의 첫번째 선생님입니다(2020)>, 라히마 볼드윈 댄시, 강도은 옮김, 정인출판사, 서울, p.242.
우리가 하는 '훈육'은 바로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기 위한 하나의 사랑 표현 중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훈육'이라는 명목하에 아이를 꺾어 버리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