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재조명

추억

kshroad 2021. 6. 20. 22:47
728x90
반응형

햇볕이 쨍쨍해지더니 어느덧 여름이 한 걸음 다가온 것 같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이 되면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가만히 있어도 무더운 날씨였지만,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사카린을 넣고 찐 옥수수를 먹으며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운지도 모르고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었다. 특히 저녁에 대청마루에 모기장을 설치해서 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간식들을 먹으며 별을 보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봄이면 들에 나가서 쭈그려 앉아 쑥과 달래를 캤던 기억, 여름이면 밭에 가서 옥수수를 따서 하모니카를 불었던 기억, 가을이면 뒤뜰에 있는 감과 밤을 따려고 막대기를 들고 이리저리 휘둘렀던 기억, 겨울이면 뜨끈뜨근한 군고구마를 구워주셨던 기억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앞마당에 있었던 큰 무화과나무이다. 늦여름이 되어 잘 익은 무화과가 어찌나 맛있었는지 할머니 집에 가자마자 무화과나무로 달려가고는 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서부터는 도심의 작은 아파트에서 계셨는데, 방학이 되어 내려갈 때면 끊임없이 리필되는 밥상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배가 터질 것 같이 배불렀지만, 그래도 할머니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음식들이 맛있어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추억(追憶) :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국어사전에 따르면 '추억'이란 追 쫓을 추, 생각할 억을 사용하여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追쫓을 추는 쫓는다는 뜻과 더불어 '거슬러 올라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생각할 억은 心 마음 심과 意 뜻 의가 결합한 글자이니, 추억한다는 것은 단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다. 추억한다는 것은 소중한 그때 그 시절로 거슬러 돌아가 마음으로 느끼며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도 감사한 일은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여행했던 시간들이다. 거동이 불편하셨기에 많은 곳을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 손을 잡고 숲길을 거닐었던 시간, 맛있는 음식을 드시고 즐거워하시던 미소, 달달한 약주에 계곡에 누워 노래 부르시다가 낮잠 주무셨던 일, 저녁에 숙소에서 그동안 일하느라 거칠어진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고 손발톱에 예쁜 매니큐어를 발라드렸더니 소녀처럼 발그래해지셨던 볼...

할머니께서 살아오셨던 그 인생길이 얼마나 험난했고 어떤 고생을 하셨을지는 가늠할 수 조차 없지만, 써니를 키우며 할머니가 날 어루만지며 하셨던 그 한 마디에 담긴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아이고, 내 새끼, 내 강아지야."

얼마 전, 할머니를 뵙고 오는 길에도 여전히 "어쩐다냐, 하나님이 왜 나를 여태 안 데려가신다냐."만 반복하셨다. 이제는 거동조차 못하시어 요양병원에 계시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무료하실까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할머니를 만나 얼굴을 볼 수 있음에 나는 위안이 되었다. 집으로 올라오며 운전하며 문득 하나님께서 할머니를 이 땅에 보내주심은 우리에게 '사랑'을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베풀어 주셨던 그 무한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헌신. 그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할머니는 참 이 땅에서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한 할머니가 존경스러웠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이 시간을 추억하겠지라는 생각에 시간을 내어 한 번이라도 더 할머니를 보고 싶어졌다. 코로나19도 종식되어 손을 맞잡고 꽉 안아 드리는 날을 기대해 본다.

728x90
반응형

'삶의 재조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Husband-and-wife Play  (0) 2022.01.18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0) 2021.08.25
내가 감당해야 할 숙제  (0) 2021.05.23
부모된 마음  (0) 2021.05.22
'나눔'의 또다른 의미  (0) 2021.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