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재조명/육아 일기

어떤 아이로 자랐으면?

kshroad 2021. 1. 1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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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써니가 분별력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로 말이야. 알맞은 때에 알맞은 말을 용감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분별력은 자기만의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신념은 자존감이 있을 때 비로소 실행되고 말이야. 물론 자기만의 생각만을 고집할 땐 독선이 되면 안 되겠지. 그렇기에 신앙 안에서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안에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해.

○ 나는 어떤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기준을 정해놓고 싶지 않아. 내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잖아.

●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절대적인 기준이 있잖아.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절대'적인 것들을 상대적인 '선호'의 문제로 돌릴 때, 가치관의 혼란이 오는 것 같아. 하나님은 하지 않으시는 절대적인 분이시잖아. 우리가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정말 아이를 책임지고 먹이고 기를 때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으로 아이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기에 아이를 대하며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혜를 구해야 하지. 많고 많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생각해보자는 거야.

○ 음.. (3분 후), 나는 여유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말이야. 옳고 그름에 있어서도 무조건이 비판적이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언행에 있어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이 되었으면 해.

 

 

 부모로서 어떤 아이로 자라났으면 하고 바라는 면이 있다. 이왕이면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외모도 출중했으면 하고, 이왕이면 운동도 잘했으면 좋겠고. 이렇게 나열하면 끝도 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왕이면’의 이면에는, 아이를 나의 소유이자 전부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밑바탕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막 교직생활을 시작했을 때, 교통이 불편한 학교로 출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고, 해가 지고 10시가 넘어 퇴근하던 것이 일상이었던 그때에는 항상 ‘굴러만 가는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중고차 하나를 구매하게 되었다.

“역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야!”


그렇게 감사함으로 운전하는 것도 잠시, 차가 생기고 나자 주변의 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내 차를 보며 ‘감사함’이란 단어를 떠올리기 힘들어졌다. 여러 가지 자동차 용품과 더불어 차의 옵션, 그리고 각 차의 가격을 알고 나자 내 차가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감사 제목이었던 내 차가 한순간이 비교하는 순간 볼품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아이에 대한 마음도 이러하지 않을까?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라고 기도하던 것도 잠시, 주변의 아이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조바심이 날 것이다. 이 역시도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인간의 상대적인 기준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 전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어 하나님이라는 문을 통해 아이의 진정한 면모를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써니 역시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아이로 자라나서, 분별력을 가지고 주위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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